안동 만휴정에서

2024. 12. 10. 12:32나의 글

 
 

 

 
안동 만휴정에서 
 
만휴정이란 늦은 나이에 쉰다는 뜻이라는데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어본 희미한 기억속의 이름인데 어떤 모습일까?
만휴정, 여행 일정에 잡혀있는지 이곳에 오면서 알게 된다.
 
차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작은 언덕에서 연결되는  냇가에 설치한
다리를 건너면 바로 만휴정인데 이곳 다리에서 미스터 선샤인이란 
드라마를 찍었다고 대문짝만 한 간판이 서 있다.
 
사진 속 연인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장면은
드라마를 본 기억이 가물하지만 가슴 뭉클한
정말 인상적인 모습이다.
 
작지만 10여 m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폭포수
시원하고 운치가 느껴지는  햇살에 반짝이며 쏟아지는 폭포수
옛날이나 지금이나  보는 감회와 느낌은 비슷한 것 같다.
 
오지 중의 오지속에 숨겨진 비경을 찾아낸 만휴정이란 정자
예스럽고 정취가 물씬 풍기며 빛바랜 무심한 듯 보이는
만휴정이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토해낼 것 같다.
 
일행들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이라 오너라" 옛 양반들이 대문을 열어 달라는 격식을
흉내를 내면서 그 옛 삶과 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당시 농민들의 삶, 먹을 것이 없어 죽도록 힘들었을 텐데
양반들은 농민들을 수탈해 자기들만의 삶을 누린 것이 아닐까?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민초들의 찌든 삶이 왜 이곳을 방문하면서 생각날까?
 
물론 만휴정 주인장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환상적인 곳에서 머물며 옛 선비님들이 삶을 즐기고
후학을 가르쳤던 모습을 연상해 본다.
 
 
 

 
 

 
 

 
 

 
 

 

 

만휴정(晩休亭)이란 ‘늦은 나이에 쉰다’는 뜻으로
김계행이 말년에 얻은 정자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름이다.
 

만휴정(晩休亭)이란 ‘늦은 나이에 쉰다’는 뜻으로
김계행이 말년에 얻은 정자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름이다.
이 집주인은 김계행이란 1480년 50 나이에 이곳으로 내렸다고 한다.
 
 

 
 

 
 
 
 

 
향수(鄕愁)는 다른 말로 회향(懷鄕)이라고 하는데,
고금을 막론하고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시름이다.
향수가 깊어지면 마음의 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를 노스탤지어(nostalgia)라 부른다.
노스탤지어는 귀향, 귀거래를 뜻하는 노스토스(nostos), 괴로움과
고통을 의미하는 알고스(algos)가 합쳐진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작게는 옛집을 그리워하고, 크게는 고향을 포함한 고국을 그리며 산다.
 
 

 
 

 
 

 
계류 건너에 축대를 쌓아 터를 닦고 낮은 담을 가로로 설치하여 정자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도 정자에서 바라보는 조망을 해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만휴정에서 귀거래의 늦은 삶을 여유롭게 보낸 김계행은 천수라 할 수 있는 87세까지 살았다.
그는 자신의 처소인 보백당에서 임종하면서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항상 돈독한 우애와 지극한 효심을 갖도록 하라.
그리고 절대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는
청백리의 삶을 후손에게 유지로 남겼다.
1706년(숙종 32) 안동 지방의 유림들은 보백당 김계행, 응계 옥고(玉沽) 선생의
학문과 청백리 정신을 높이 기려 묵계서원을 짓고 이들을 주향자로 향사했다.
 
 

 

 




 
 
묵계서원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묵계서원의 기둥을 갉아먹는 개미들에게 치명적인
살충작업을 하는 날이라 그런지 통제구역도 있지만
지독한 냄새로 구석구석 돌아볼 수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옛 모습의 묵계서원
 

 
 

 
 

 
옛날 한학을 배우는 모습을 재현한 일행들
 
 

 
1684년(숙종 10) 서원을 세우고, 1706년(숙종 32) 묘우(廟宇)인 청덕사(淸德祠)를 건립하여
김계행(金係行)과 옥고(玉沽)를 제향 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훼철되기 전의 경내건물로는
청덕사(淸德祠),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을 비롯하여 극기재(克己齋) · 읍청루(挹淸樓) ·
진덕문(進德門) · 신문(神門) · 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그 뒤 1925년 도내 유림이 협력하여 강당 등 일부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하여 왔다. <다음백과에서>
 
 

 

위 두 장의 사진은
만휴정과 묵계서원을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둘러 본 모습이다.
 
만휴정과 묵계서원에서 
2024.12.3.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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