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떨어지기에 선 나그네

2025. 4. 25. 16:01나의 글

 

 
 
 
낭떨어지기에 선 나그네
 
야하게 팝콘을 터트리던 벚꽃도 끝물이고
연둣빛이 온 세상을 평화스럽게 수놓고 환희에 찬 봄날을 그려내고 있지만
나그네에겐 아름답기는 커녕 살어름판을 걷는 계절처럼 느껴진다.
 
집사람의 안면신경감압술이란 수술이 끝난 지
35일이 지난 현재
수술효과는 있을까?
 
주위분들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어보면
말소리도 똑똑하고 비대칭 얼굴이 거의 돌아왔다고 하는 걸 보면
좋아지기는 한 것 같은데
 
집사람이 몇 달 전부터 몸이 쳐지고 밥맛이 나지 않으며
1년간 몸무게가 6kg 이상 빠졌기에 가정의학과를 방문
4월 2일 CT를 찍어 본 결과 췌장의 몸통에 22mm의 혹이 발견된다.
 
췌장에 병이 생기면 생존율이 15% 미만이라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안면신경마비 감압술에서 벗어나 겨우 안정이 될 무렵인데
무슨 변고인가?
연속적으로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
 
우리 집 개 곰순이의 이유 없이 천상으로 떠나가더니
집 사람의 어금니가 부러져 임플란트뿌리를 심어놓은 상태에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며 초음파 검사를 하지를 않나
또 췌장에 혹이 생겨버리니
 
병이란 쓰나미가 몰려온다고 해야 하나?
엎친데 덮친 격이랄까?
나그네 그만 마음이 무너져 버린다.
 
일주일 후 췌장 전문 소화기내과의 정밀분석 결과 암은 아니고 
물혹이라는 의사의 말씀에 만세를 부를 정도로 기쁘고
온 세상을 혼자 다 독차지한 기분이었다.
 
암은 아니고 물혹이지만 MRI촬영과 혈액검사를 진행하여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본다는데 내시경 초음파를  진행하지 않는
것을 보니 췌장암이 아닌 것 같지만 MRI 판독을 기다릴 수밖에..
판독 결과는 5월 16일이다.
 
이 모든 사실들이 5개월 안에 벌어진 
건강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이었다.
 
몇 달 동안 가슴 조이며 집사람의 건강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내내
꿈자리는 뒤숭숭하고 짝 잃은 나그네의 처절한 모습
죽음이란 주제를 실감하면서
혼자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그간 잘못한 것들만 생각나게 만든다.
 
시골살이 15년 차
화목보일러에 불을 지피면서 人이란 글자의 오묘한 뜻을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한 개비의 장작은 불이 잘 붙지 않지만 두 개비의 장작이 人자처럼 포개지면
영락없이 활활 불타 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부부라는 인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장작 한 개비처럼 홀로 된다는 상상의 나그네의 맘 고생
부부의 한쌍은 언젠가 먼저 천상으로 가겠지만
건강하게 천수를 다할 때까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겹치는 불행한 순간들은 지나가고
천수를 누릴 때까지 오순도순 손잡고 잘 살아가는 노년의 아름다운
바람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굴미 머무는 언덕에서
2025.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