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이 세수했어요.

2020. 6. 2. 11:02구르미 머무는 언덕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야리야리한 새싹들이

언 손을 호호불며 동동 발을 구르는데

작약들은 추위야 물렀거라 추운 줄 모르고 쑥쑥 커가며

아기 티를 벗어버리고 뜨락 구경에 나선다.

 

 

추위가 무서운 주변 새싹들은 시간이 멈춘 듯

제 자리 걸음에 마음도 서러운데

쑥쑥 자라난 몸집을 자랑하는 작약들

 

 

소년기에 들어선 작약이

부럽게 쳐다보던 뜨락의 꽃들 중

화사한 벚꽃과 폴때기, 꽃잔디가 풀풀 흘리는 향기에

그만 기가 질리고 만다.

 

 

 

뜨락에선 철쭉이 콧대를 세우며 울긋불긋 광대놀음이

 한창이고 금낭화 복주머니 주렁 주렁 매달고 희희낙락이다.

주변을 바라보는 작약, 초라한 모습에 속상하지만

왕년에 한 자락 했던 터라

 

 

시곗바늘 돌고 돌아 청년기에 들어서며

서서히 자신감을 찾기 시작한 작약들이 꽃봉오리에

연둣빛 이파리에 푸른 끼를 더하며 쑥쑥 자란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작약이 품새를 넓히자

 화사한 벚꽃들도 만세 부르던 철쭉도 모두 가 버리니

쓸쓸한 뜨락엔 풀들만 무성하게 자란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한몫한다는데

볼품없는 뜨락에 분홍빛 등불을 밝혀야 한다.

작년보다 더 아름답게 등불을 밝혀야 한다.

 

꽃봉오리에 빗님이 내려앉는다.

톡톡 내리며 볼을 어루만져 주는 빗님이

잠자는 작약의 마음에 세안을 해 주자

꽃불을 치켜세우며 뜨락을 붉게 물들인다.

 

 

유월의 창문을 열리자

후끈거리는 바람이 낮설지가 않고

작약이 서서히 꽃잎을 내려놓는다.

 

뜨락을 뜨겁게 이어갈 절세미인은 누굴까?

장미,백합, 다리아가

 

바통을 이어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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